한참 어렸을때, 어머니가 나를 위해 책 한권을 사 오신 적이 있었다. 내심 장난감 선물을 기대할 나이, 난데없는 책 선물에 실망하기도 잠시, 제목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참지 못했다. "엄마 딸꾹이래. 딸꾹.^^ "
지금 기억으로는 어린 나이였지만 단숨에 그 책을 읽어나갔던 것 같다. 왜냐면 내용이 아나운서들의 실수담, 특히 이계진 아나운서가 입사시절부터 직접 겪은 에피소드를 재밌게 쓴 것이었기 때문인데 이계진 아나운서의 재치어린 말솜씨와 긴장된 순간에서 벌어지는 웃지못할 해프닝들이 어린 내가 읽기에도 손색이 없을만큼 유쾌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과 저녁을 먹으며 책에서 읽은 내용을 흉내내는 것은 즐거운 저녁시간을 만들기 위한 나의 의무였다. 이십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책은 색이 바랜채 책장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나에게 있어 이계진 아나운서는 기존의 딱딱한 아나운서의 이미지를 바꿔 준 첫번째 인물이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라는 동물에 관한 퀴즈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친근하고 차분한 진행으로 이끌며 여러 동물들의 목소리를 모사하여 신기한 상식과 지식을 심어주는 선생님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애정과 책임의식을 가르쳐준 분이었고 혹여 실수를 하더라도 웃으며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준 인생선배이기도 하다.
오늘 나는 나의 오래된 선생님을 티비에서 보았다. 작은 실수 하나 하나에 애정을 갖고 오랫동안 몸 담았던 방송에서 물러나 한 정당의 국회의원이 된 그는 국회 농해수산위원회 소속 의원으로써 미국쇠고기 청문회에 질의자로 나섰다. 난 얼굴이나 목소리가 너무나 친숙한 그의 입 하나하나를 주목할 수 밖에 없었다.
불과 6개월여전, 수입재개 절차에 의해 국내에 들어온 미국산 쇠고기 일부에서 작은 뼈조각이 나왔을 때 농해수산위원회 소속 의원으로써 광우병 위험물질이 포함된 뼈조각이 들어왔다며 국민의 건강이 위협 받으므로 당장 수입금지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은 나중에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2007.10.08 국회 농해수산위원회 위원, 이계진, 홍문표, 권오을, 김우남, 김영덕, 강기갑 의원
"미국산 쇠고기에서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이 발견된 것에 대해 미국 정부의 책임있는 답변과 사과를 촉구한다"며 즉각 수입중단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
시종일관 그는 여당이지만 정부측의 협상과정이나 담당공직자들을 질책하면서도 광우병 문제에 대한 왜곡된 사실에 야당의 정치적 목적이 아니냐며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 했다. 어느 한쪽에 기울어 지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랄까? 그러나 지나치게 왜곡되었다는 광우병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한 번 알리고 싶은 의도가 지나쳤을까. 박상표 수의사연대 정책국장에 질의를 하던 중 무리를 하고 말았다.
MBC가 방영한 절룩거리는 소 도축 동영상에 대해 언급하던중, 그는 절룩거리는 소라고 해서 모두 광우병은 아니지 않느냐, 방송이 지나치게 왜곡된 것만을 방송해서 여론이 더욱 악화되었다는 취지로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동영상에 나온 것처럼 절룩거리는 소는 모두 광우병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동물을 키워봐서 아는데 소가 절룩거리는 것은 찬바닥에서 자서 그럴수도 있고..다른 이유도 있죠?"
"그렇지만 절룩거리는 소는 100% 모두 광우병 검사를 해야합니다."
"아니 내가 묻는 취지는 절룩거린다고 해서 광우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 이말입니다. 맞죠?"
"....의원님의 어떤 의도로 질문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의원님 작년 청문회에서는 반대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광우병소 반대하시고 FTA반대하셨으면서 지금은 왜 다른 말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런 말 하는 걸 들었습니까?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질문은 국회의원이 하는 것이지 참고인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그럽니까"
이의원의 유도질문에 당황한 박상표 정책국장의 돌출발언(?), 그리고 그 돌출발언에 또 당황한 이의원, 오히려 이의원이 거짓말을 한 꼴이 됬다. 그는 오늘 청문회에서의 이 한마디로 그동안 쌓아두었던 많은 것들을 잃었다. 블로그와 홈페이지는 네티즌들의 비난과 욕설로 가득차고 뉴스에서는 전형적인 한 입가지고 두말하는 기회주의자로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것뿐 아니라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국민들이, 더군다나 정치에 무관심했던 우리 학생들이, 단지 야당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된 허수아비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식의 발언을 하는 그를 보면서 당황스러웠다. 애써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까?
TV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국민의 인기를 등에 업고 여의도에 입성한 그가 국민의 요구를 애써 정치적 선동에 이용당한 내용없는 외침이라 단정짓는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생방송 뉴스 중에 터진 딸꾹질로 국민에게 웃음을 주었던 그가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국민의 비웃음을 받는 사실은 너무나도 안타깝고 부끄러웠다.
2007.05.02 FTA 농어업 부문 협상 결과 실태 규명을 위한 청문회, 이계진 의원
“지난 3월 현재 한·육우 사육농가는 총 18만9000가구로 이 중 경쟁력이 떨어질 것으로 판단되는 100마리 미만 사육농가는 전체의 98.9%인 18만7000여가구로 나타났다”며 “이는 40%의 관세가 없어지는 15년 후 한·육우 사육농가 대부분이 도산하거나 몰락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그의 말 한마디만을 꼬투리 잡는 것은 아니다. 이젠 나의 마음속에 있는 그 분이 아닌 정치논리에 흠뻑 빠져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오히려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원칙과 소신> 그 두 단어를 지키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것인가? 정치를 하게 되면, 눈 앞에 보이는 그것만 얻게 되면, 훗날 국민의 평가와 시선은 결코 두렵지 않게 만들어 주는 강심장이라도 이식해 주는 것인가?
오늘 난 어렸을때 부터 변함없이 존경해왔던 한 선생님을 이제 다시 평가하게 되었다. 나 뿐만이 아니라 그가 정치라는 새로운 도전을 할 때 찬성했던 많은 사람들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한나라당은 싫어했어도 방송인 이계진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소박하지만 적어도 20년을 이어져 왔던 나의 한결같은 마음이었다.